제목 | 한 남자의 지독한 사랑으로 만들어낸 눈부신 건축물, 타지마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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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4.11.25 |
작성자 | 정*경 |
상품/지역 | 문화역사탐방인도/네팔/스리랑카 |
샤자한의 지독한 사랑으로 만들어낸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타지마할 샤자한의 탄생과 유년기 무굴제국 4대 황제 자항기르의 셋째 아들로 라호르에서 태어난 샤 자한은 당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며 할아버지가 직접 지어준 쿠람이라는 이름을 갖고 세상에 발을 디뎠다. '쿠람 시하브 웃 딘 무하마드'는 페르시아어로 “기쁘게 한다.”는 뜻이다. 샤자한은 어린 시절부터 폭 넓은 교양을 쌓아가며 10대 중반에는 전쟁에 참가하여 군사적 능력도 보여주었으며, 16살 때에는 건축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나타냈다. 무굴제국의 장자에게 왕권을 물려주는 방식이 아닌 전공(戰功)을 세우고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용맹한 전사이자 각종 기예에 출중하고, 인물까지 뛰어난 인물이었다. 16살의 소년이었던 샤자한은 당시 친구들과 시장 구경을 나왔다가 한 미소녀를 발견하게된다. 이 소녀가 바로 아르주만드 바누 베굼이었다. 샤자한은 그때부터 불 같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으며, 아버지에게 찾아가 아르주만드와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샤자한의 아버지는 결혼을 허락했지만 이듬해 샤자한을 페르시아 공주와 결혼을 시켰다. 또한 이슬람의 관습에 따라 페르시아 공주 외에도 여러 여인과 결혼을 해야했다. 당시 무굴제국 황제 자리는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 종족별로 황비를 들이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운명적인 사랑 그리고 샤자한의 슬픔 그렇게 사랑하는 여인과 만나지도,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로 5년이라는 긴 기간을 기다렸던 샤자한은 1612년 5월 10일 황실 점성술사들의 허가를 받아 그토록 갈망하던 세번째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며느리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황제는 “황궁의 빛”이라는 뜻으로 “뭄타지 마할”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궁정 연대기 기록자들은 샤자한과 다른 아내들의 관계는 혼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그쳤으며 샤자한의 무한한 관심과 애정은 오직 뭄타지마할 만을 향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뭄타지마할은 19년의 결혼생활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 가운데 8명은 사망했으며, 1631년 샤자한을 따라 전쟁터를 따라나선 뭄타지마할은 14번째 아이(딸 가우하라 베굼)을 낳다가 부르한푸르(지역명)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왕비는 세상을 뜨기 전 두가지의 소원을 말했는데, 첫번째는 다른 여인에게서 아이를 갖지 말아라, 두번째는 나를 기념하는 묘당을 지어 달라는 것이었다. 수많은 부인들 중에서도 뭄타지마할, 한 여인만을 깊이 사랑했던 샤자한은 식음을 전폐하고 비통한 마음에 머리카락까지 하얗게 변해버려졌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아그라에서 묘당의 건축이 시작되었다. 타지마할의 건축과 시작 타지마할은 이란의 쉬라즈 출신인 우스타드 이샤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등에서 유명한 건축가와 장인들을 불러모아 짓기 시작하였다. 총 2만여 명이 동원되었으며, 건축 자재 운반을 위해 1,000여 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었으며, 라자스탄의 마크라나에서 대리석을 비롯하여 건물안의 세세한 장식을 위하여 러시아와 중국에서 여러가지의 돌이 수입되어 사용되었다. 1631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22년만인 1653년에야 드디어 완공된 타지마할. 건물의 정면 마당에는 수로가 있는 전형적인 무굴양식의 정원을 두고, 좌우로는 회교사원과 회당을 둔 구조로 되어있다. 뒷편으로는 야무나강이 흐르고 있는데 높은 축대로 쌓여진 야무나강쪽의 뒷면을 제외한 타지마할의 삼면은 모두 높은 담이 둘러져 있다.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에는 타지마할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 있고, 이 관문을 통과하면 널찍한 마당이 나오는데 타지마할은 이 마당을 건너 또 다른 문을 통과해야 볼 수 있다. 타지마할로 통하는 최종 관문으로 세원진 붉은 사암으로 된 문에는 아랍어로 코란의 경구들이 새겨져 있다. 샤자한은 제국의 군대를 유지하고 건축사업을 벌이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걷었다. 상업과 수공업을 적극 장려하면서 라호르, 델리, 아그라, 아메다바드 등을 제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멀리 떨어진 도시들을 도로와 수로로 연결시켰고, 수도를 아그라에서 델리로 옮기려 했다. 샤자한이 제국을 통치하던 시절, 제국의 예술과 건축은 크게 융성했다. 타지마할 외에도 아그라 성을 확장하고 델리의 붉은 성을 건설했으며, 자마마스지드와 모티마스지드 그리고 오늘날 파키스탄 라호르의 와지르칸 모스크와 살라마르 정원 등 많은 건축물을 지었으며, 상당수의 건축물은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슬람 건축에서 무덤이라는 건축물이 이토록 아름답고 거대한 이유는 사후 세계에서 죽은 이가 융숭한 대접을 받기 원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곁을 떠난 뭄타지마할이 사후 세계에서 대리석과 보석으로 수놓아진 아름다운 곳에서 잠들기를 바라는 샤자한의 마음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게 한 것이다. 때문에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은 죽음을 의미하는 밤, 특히 보름달이 뜰 때 가장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샤자한의 말년 1657년 샤자한이 병고에 시달리는 사이 아들들은 권력투쟁을 일으켰다. 장남이었던 다라시코는 샤자한을 대신해서 통치를 하고 있었지만, 차남 샤슈자, 삼남 아우랑제브, 막내 무라드 바크시 등 형제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치열한 전쟁 끝에 승리의 몫은 아우랑제브로 돌아갔다. 아루랑제브는 형이었던 다라 시코를 참수형에 처하고 아버지 샤자한을 아그라 요새의 탑에 감금했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 샤자한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샤자한은 사랑했던 아내가 묻힌 타지마할을 바라볼 수 있게 자신이 갇힌 방에 구멍을 내달라는 것, 이 것 하나만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1666년 샤자한은 세상을 떠났으며, 시신은 백단향 관에 안치되어 강을 통해 타지마할까지 운구 된 뒤 뭄타지마할 곁에 묻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