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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실크로드 3 <가욕관>
작성자 서*도
작성일 2018.06.04


 

 

전날 난주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새벽녁에 가욕관역에 내린다

2층 침대에 누웠는데 잠자리가 옹색하고 불편해 숙면은 아예 기대하지 않았다

열차 바퀴가 레일의 이음새를 지나칠 때마다 덜컹거리며 들려오는 금속성 마찰음이 어느새 자장가처럼

들릴 때쯤 먼동이 희붐해지는가 싶더니 바로 열차를 내려야했다

졸음에 겨운 눈으로 겨우 일어나 가욕관역을 나서니 새벽 찬공기가 와락  품속으로 안겨오며 선잠을 깨운다

 

이번 일정이 이동거리가 워낙 멀기에 야갼열차 이동은 낮 동안의 관람시간을 벌기위한 방법일 수도 있지만

체력적 부담이 따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옛날 대상들이 실크로드의 하서회랑을 따라 한 달은 걸었을 구간을 난 하룻밤 동안 편안히 누워 이동하는 것이니

이 정도 불편도 감수하지 못한다면 아예 집을 나서지 말았어야 할 일이다

고로 군소리는 닫아야 한다....

 

하서회랑(Hexi Corridor)이란....

 

 

하서회랑(河西回廊, 허시후이)은 하서주랑(河西走廊, 허시쪼우랑)이라고도 한다

감숙성의 황하강 서쪽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하서`이고

남쪽 기련산맥과 북쪽 마종산, 용수산 사이에 좁고 길다란 복도처럼 생긴 지형이어서 `회랑`이다

북서에서 동남 방향으로 길이는 약 1,000 km, 폭은 수km에서 100 km 정도이다

양쪽으로는 산맥과 고원지대이어서 옛부터 모든 길은 이곳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BC2세기까지 유목기마민족인 흉노족이 지배하던 이곳을 BC121년 한무제가 장수 곽거병(?去病), 위청(衛靑)을 앞세워

그들을 정벌하고 만리장성을 쌓은 후 무위, 장액, 주천, 돈황의 하서사군(河西四郡)을 연 이래

서역의 신강위구르 지역으로 이어지는 중요통로이자 고대 실크로드의 일부분이 되었다

 

한무제가 흉노를 몰아내고 비로소 무위를 떨쳤다고 하여 무위(武威), 겨드랑이 활짝 폈다고 하여 장액(張掖),

무제가 하사한 술을 곽거병이 샘물에 타서 부하들과 함께 나눠마셨다고 하여 주천(酒泉),

앞으로 크게 번성하리라 하여 돈황(敦煌) 등의 지명이 되었다고 전한다

 

 

 

 가욕관역

 

 

 

가욕관(嘉?關 Jiayuguan)

 

 

동쪽끝 산해관(山海關)에서 장장 6,300 km를 달려온 만리장성이 서쪽에서 끝을 맺는 곳이 가욕관이다

만리장성의 관문 중 건축 당시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관문으로 

명 홍무(洪武) 5년 1,372년 군사방어용으로 세워져 중원의 길목을 수호하는 군사 요충지였고

하서회랑을 따라 서역과 장안을 오가는 사신과 대상의 출입국 심사가 이뤄졌던 곳이다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160년 동안 20여 차례의 중건을 거쳤다

국경으로서의 역활은 명나라가 멸망하며 기능을 잃게 되는데 청나라가 영토를 신장까지 확장하며

관문으로서의 역활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반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거쳐 1,987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A5급이면 최고의 관광명승지이다


 

 

가욕관을 지은 명의 풍성(馮腥)장군 동상

 

 

 

구안천호(九眼泉湖),

기련산맥의 만년설이 녹은 물이 땅속을 흘러와 솟아오른 물로 형성된 호수

 

 

가욕관의 전체적 구조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에는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

동쪽 끝 산해관에는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고 씌여있다

아무튼 중국의 여행지를 다녀보면 천하제일이란 글귀가 자주 보인다

중국은 규모면에서 일단 크고 우람한 것을 좋아해 허장성세(虛張聲勢)적 경향이 다분함을 느낀다

중국의 고속철을 타 본 사람이면 알 테지만 역사의 규모 하나만 봐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이다....

 

일찌기 중국의 이런 점을 지적한 사람이 있으니 연암 박지원이다

1,780년의 사행 후 남긴 `열하일기`에서 "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큼을 모르고,

산해관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제도를 모를 것이다 " 라고 하면서 그 규모와 위용를 평가했다

이와 반대로 일본은 비록 작아도 실속적이고 빈틈없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차량, 주택 등 모든 면에서....

 

 

 

 

옛날에는 계단 좌측의 통로를 따라 말을 타고 올라갔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보니 경사가 꽤 가팔라 말이 아무리 잘 달린다고 해도 과연 이 정도의 경사를

달려올라 갈 수 있을지 좀 의문이 든다

 

 

 

저멀리 3,000m 이상의 만년설로 덮힌 산이 기련산맥이다

 

 

 

둘레 733m, 높이 11m, 내성과 외성의 이중 성벽으로 지어진 사각형 구조이다

황토를 판축하여 굳힌 벽돌로 만들어졌다

 

 

 

 

동서로 각각 누각(문루)과 옹성을 가지는 성문이 있는데

동쪽은 광화문, 서쪽은 유원문이다

 

 

 

가욕관 성루에서 보면 기련산맥으로 이어진 만리장성이 뚜렸하다

가욕관은 하서회랑에서 폭이 가장 좁은 곳에 위치했다

이곳에서 기련산맥과 흑산 사이의 거리가 30리 밖에 되지 않아 지리적으로 요충지가 될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벽돌 1장,

가욕관의 설계를 담당한 사람이 이개점(易開占)이다

가욕관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벽돌의 숫자까지 정확히 계산하여 1장의 여유분을 두었다고 하는데

실제 건축하고 나니 딱 1장이 남았다는 것이다

 

 

 

 

저 문을 나서면 이제 서역이다

가욕관은 실크로드 당시 세관 및 검문소에 해당했다

 

 

 

가욕관의 서문

 

 

 

가욕관 서문을 빠져나와 본 서역의 땅

 

 

 

기련산맥(祁連山脈)으로 이어지는 만리장성의 남쪽끝이 저멀리 보일 정도이다

과거 실크로드를 지배하는 자가 중국을 지배한다고 했다

침입하는 외적이든 대상의 행렬이든 이곳만 지키면 빠져나갈 곳이 없어 보인다

 

기련산맥의 만년설이 녹은 물이 땅속을 흘러 가욕관에서 솟아올랐기에 관문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이 없었다면 이 메마른 고비 지역에서 관문을 지키는 수많은 병사들의 생존이 불가능했을 테니....

기련은 흉노어로 하늘이란 뜻이다

 

 

 

실제 만리장성은 높이가 대부분 그다지 높지 않다

흉노의 방어용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과 보급용으로 데리고 다녔던 양이 뛰어넘지 못할 정도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은 진, 한, 명의 3왕조에 걸쳐 축성되었고 제일 길게 쌓은 시기는 한무제 때로 우즈베키스탄까지 이어졌다

 

 

 

장성박물관,

만리장성을 테마로 장성의 역사와 현황을 전시하고 있는데

건물은 고대 봉화대의 모양으로 지어졌다

 

 

 

이개점, 가욕관의 설계자

 

 

 

명의 풍성 대장군, 가욕관의 건축자

 

 

 

가욕관에서 가족과 아쉬운 작별을 하며 서역으로 떠나는 사신의 모습을 담은 그림

 

 

 

서역에 도착해 서역사람과 만나는 사신

 

 

 

현장법사(삼장법사),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의 고승 혜초보다 100년 앞서 대당서역기를 남겼다

 

 

 

마답비연(馬踏飛?)의 청동분마(靑銅奔馬),

한나라 장수의 무덤에서 출토된 조각상인데 날으는 제비를 밟고 달릴 정도로 빠른 말을 형상화한 것이다

 

장건이 사신으로 서역을 떠난 지 13년만에 돌아왔을 때 한무제가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서역의 페르가나(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존재한다는 우수한 혈통의 말에 관한 내용이었다

언제나 말을 타고 침입하는 흉노를 물리치려면 무엇보다 흉노보다 월등한 말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이후 한무제는 달릴 때 갈기 부분에서 피땀을 흘린다는 한혈마(천마)를 구해 기마병의 전력 보강에 집중했고

발군의 장수 곽거병, 위청의 덕택에 힘입어 서서히 흉노를 제압하여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다

 

 

 

 

가욕관 관람을 마치고 둔황으로 향하는 길 주변의 고비땅

중국인한테 그동안 자주 들어왔던 대로 고비사막이라고 하면 그들은 고비사막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냥 고비땅이라고만 한다

타클라마칸사막처럼 모래로 이루어진 지형이 아니라 모래보다 큰 자갈돌이 주류이고 식물도 더러 자라기 때문이란다

본인들은 사막이 아니라는데 정작 우리만 사막이라고 부르는 상황이다

 

 

 

풍력발전기가 마치 숲을 이룬 듯한 고비땅이 이어진다

고비땅은 황사를 유발하는 등 단지 쓸모없는 황무지만은 결코 아니다

이제 중국인에게 황금알을 낳는 땅이 되었다

풍부한 석유, 석탄 등의 엄청난 지하자원 매장량과 아울러 지상의 바람과 태양열 에너지까지 무한제공되는 땅으로 변모되었다

 

 

 

무덤,

메마른 고비땅에 매장된 시신은 천년 후에까지 건시(干屍)로 남아있을 것 같다

타클라마칸사막의 한가운데 존재했던 누란 등의 고대도시 주변에서 발견되는 시체는

이집트의 미이라에서처럼 방부처리를 하지 않았음에도 수천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지만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고 있다

공기가 너무 건조해 부패가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돈황,

가욕관을 출발한지 3시간만에 하서회랑의 서쪽끝 오아시스 돈황에 도착한다

돈황(敦煌)은 `크게 번성하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기원전 11년 한무제가 이곳의 흉노를 무찌르고

한족을 이주시켜 서역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감숙성과 청해성, 신강성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이다

 

과거 동서 문화가 만나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였고 현재 인구 19만의 도시이다

내일 막고굴과 아울러 명사산 월아천을 보기 위함이다

 

 

 

 

돈황에 한국식당이 있을 줄이야....

마지못해 기름진 중국음식만 며칠 먹다가 밥과 김치에 고들고들하게 구워진 돼지고기를 상추쌈으로 먹는 맛이 무척이나 좋았다

아무리 흔한 일반식도 상황에 따라 특식의 별미가 된다

 

 

 

저녁 식사 후 사주 야시장 탐방

 

 

 

양고기 꼬치를 만드는 회족

 

 

 

사주 야시장에서 술 한잔에 양고기꼬치는 기본코스이다

 

 

 

초입의 양고기 꼬치집을 제외하면 야시장 거리는 온통 돈황 막고굴 관련 기념품 가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