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실크로드 1 <맥적산 석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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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도 |
작성일 | 2018.06.04 |
오래 동안 실크로드는 나에게 있어 비단이 서양으로 전해진 길이란 정도로만 인식된 채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대상이었다 그러던 나의 인식에 변화가 생긴 것은 2년 전 다녀왔던 투르드몽블랑 트레킹 직후였다 당시 함께 걷던 일행으로부터 실크로드를 오로지 두 발로 걸어서 완주한 이야기를 담은 `나는 걷는다`란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귀국 곧바로 그 책을 구입해 읽으면서 부터이다
프랑스 언론 기자였던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예순을 넘긴 나이에 1999년부터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서안까지 12.000 km를 사 년 동안 걸은 내용을 세 권의 책(Longue Marche)으로 펴낸 것이었는데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힘든 과정들을 극복하고 마침내 목적지까지 이르는 과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있어 참 흥미롭게 읽었었다 실크로드를 걸으며 지니치는 도시 및 유적들에 관한 묘사가 화려한 미사여구를 전혀 포함하지 않았음에도 전직 기자다운 설명에 이끌려 책를 읽으며 직접 두 발로 걷지는 못할망정 나도 한번은 보러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게 이번 여행의 동기이다
실크로드
실크로드란 명칭은 1877년 독일 학자인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에 의해 불려지기 시작했는데 그 유래를 살펴보면...
기원전 141년 미앙궁에서 경제가 죽고 황태자 철(徹)이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이때 나이 겨우 16세였으니 그가 한왕(유방)조 창업 이래 전한의 황금 시대를 이룩한 무제(武帝)이다 무제는 중국 역사상 진의 시황제와 더불어 `진황한무(秦皇漢武)`로 일컬어질 정도로 과감하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내정을 굳건히 다지는 한편 수십 년 동안 북쪽의 흉노와 취해오던 화친정책을 굴욕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강경책으로 전환하게 된다
당시 흉노에게 패해 돈황에서 멀리 북쪽으로 도망친 월지국이 절치부심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제는 월지와의 동맹을 위해 BC 138년 장건(張騫)을 사자로 보낸다 장건은 1백여 명의 사절단자를 거느리고 장안을 출발하지만 도중 흉노에 포로로 붙잡혀 10년 동안 억류생활을 하게 된다 흉노의 여성을 아내로 맞아 자식을 낳고 완전히 흉노가 된 것처럼 살지만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하여 월지국을 향한다
< 서역으로 떠나는 장건이 말을 탄 한 무제에게 절을 올리는 모습, 돈황 막고굴 벽화 >
이 무렵 월지국(아프가니스탄 지역)은 평화로운 시대를 보내고 있었기에 굳이 장건의 동맹 요청을 받아들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더욱이 한나라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군사동맹의 효과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군사동맹의 목적은 무산되고 귀국길에 또다시 흉노에 의해 억류당하게 된다 흉노의 내분을 틈타 1년 여만에 재탈출하고 처음 장안을 출발한지 13년만인 BC126년에 돌아오게 된다 장건의 원래 목적은 실패했지만 그가 오가는 길에 직접 목도했던 서역에 대한 군사, 정치, 경제, 지리 등의 정보는 한의 조정에 일대 충격의 파문을 일으켰다 결연한 의지로 여행의 신기원을 이룬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장건의 보고에 한 무제는 매우 흡족해하며 그에게 지식이 해박하고 안목이 넓다는 의미의 박망후(博望候)의 칭호를 내린다
정보들 중 보다 직접적인 것은 페르가나 지역(우즈베키스탄)에서 우수한 군마의 종류를 발견한 것인데 장건은 이를 천마(天馬)라고 보고했는데 한 무제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기마전을 위한 이상적인 말로 여긴다 이후 무제는 자주 장건을 불러 서역의 정세를 물었고 장건의 지리적 정보를 바탕으로 여러 차례의 서역 원정을 통해 흉노를 제압하며 영토를 서쪽으로 확장시켜 한무제의 위엄이 서역까지 뻗치게 된다
당시의 동서 양쪽 지역을 주름잡던 한나라와 로마는 서로를 상상의 나라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장건의 서역 개척으로 인해 두 나라는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으며, 이후 서역과 한나라는 군사적, 외교적, 정치적 교류를 넘어 상업적 교류를 시작했다. 중국의 비단, 철기, 도자기, 칠기, 양잠, 화약기술 등이 서역으로 수출되고 향료, 유리 공예, 옥 같은 사치품과 우수한 말, 서역의 동식물들이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다양한 물품 교역과 아울러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불교, 이슬람 등 다양한 사상과 문화의 전파였다
실크로드의 기점과 종점은 서안에서 로마까지만으로 한정된 게 결코 아니었다 사방팔방으로 퍼져 그중의 한 노선은 저멀리 신라의 경주까지 이어졌다 신라 흥덕왕 시기에 서역에서 들어온 물건과 풍습이 유행의 첨단을 걷던 신라인을 매혹시켰고 이에 흥덕왕은 `사치와 호화를 일삼는 백성들이 진귀한 외래품만 선호하고 토산품을 배척한다며 외래품 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물품 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오고가 흥덕왕능묘 무인상, 괘릉 무인상은 눈이 푹 들어가고 코가 높은 심목고비(深目高鼻)의 서역인 용모을 하고 있고 익히 알고있는 처용의 묘사도 서역인 용모이다 천마총의 날개 달린 천마의 기원은 그리스 신화의 페가수스이고, 1950년대 불국사에서 발견된 돌십자가는 경교(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파)가 전파된 것이었고 아잔티나 엘로라와 같은 인도의 석굴문화는 중국 키질석굴, 막고굴 등의 석굴사원 형태를 거쳐 신라에서 석굴암이라는 역작으로 탄생되었다 이처럼 실크로드는 하나의 선이 아니라 사통팔달로 연결된 네트워크였다
< 흥덕왕릉, 괘릉 무인상 >
서안의 센양(함양)공항에 내려 점심 식사부터 한다 서안은 지리적으로 중국의 중심에 위치해 북경시간를 정한 기준이 된 곳으로 주변 지형이 평탄한 관중평원으로 토양이 비옥하고 기름져 역대 13대 왕조의 1.100여 년 동안 수도였다 서안에서 우루무치까지 예정된 일정을 소화하려만 약 3500 km를 이동해야 하는 다소 힘든 여정이기에 체력관리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식사 후 곧장 서안의 섬서성을 출발해 차량으로 5시간 거리에 있는 감숙성의 천수(天水)로 향한다 내일 맥적산 석굴을 보기 위함이다
맥적산 석굴(麥積山 石窟, Maiji Mountain Grottoes)
맥적산(麥積山)은 142m의 높이로 우뚝 솟은 바위산이 마치 보릿단을 쌓아 올린 듯한 모습이어서 불리는 이름이다 맥적산 석굴은 돈황 막고굴, 낙양의 용문석굴, 대동의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 4대석굴로 꼽힌다 일명 `동양의 조각박물관`으로 불리는 조각 예술의 보고이다
석굴이 처음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6국 시대 후진 왕조(AD 384-417) 때부터인데 청나라 시기까지 계속해서 만들어졌기에 1,6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석굴이다 현재 석굴 221개에 7,800여 개의 불상이 있으며 벽화의 총면적은 1,0000 ㎡ 정도인데 하이라이트는 단연 절벽 중앙에 만들어진 대불상이다
천수(天水, 텐수이)는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 진(秦)이 발상한 진나라의 근원지이며 실크로드의 관문이다 예로부터 천수에는 미인이 많다고 하는데 전날 늦게 도착한데다 피곤에 절어 여인의 얼굴을 봤는지조차 기억에 없다 숙소에서 약 1시간 반 정도 이동하여 맥적산 석굴에 이른다
중국의 관광지에서는 으레 셔틀버스 환보차나 전동카를 타야 역내를 이동할 수 있다 입구에서 10여 분 전동카를 타고 가니 저만치 보릿단인지 밀집단인지 봉곳 솟아오른 맥적산이 보인다 주변 평탄한 지형에서 솟은 높이가 142m이지만 맥적산 자체의 해발은 1,742m이다
바위산에 온통 구멍이 뚫려 마치 개미집 같기도 하고 벌집 모양으로도 보인다 불교의 초창기에는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인도의 간다라 지역에 헬레니즘 문화가 퍼지면서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여기도 최초에는 불상이 없었고 스님의 수련을 위한 감실로 석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불상 제작이 전파되고 공양주의 시주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각 시대를 반영하는 다양한 양식의 불상이 만들어졌다
대불상을 대하는 순간 불상의 모습이 흡사 다운증후군(Down Syndrome)처럼 보인다 양미간 사이가 넓고 약간 지능이 떨어진 듯한 다운증후군의 전형적 모습이다 대불상 제작을 위해 시주한 공양주가 가족 중 다운증후군 환자가 있어 그의 안녕을 소원했을까 ?
대불상은 사진에서처럼 석굴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미리 만들어 들어올려 절벽면에 붙인 목태니소(木苔泥塑)의 조소이다 즉 나무로 기본틀을 만들고 그 위에 흙 등의 재료를 붙여 만든 것이다 4대 석굴 중 맥적산 석굴과 돈황 막고굴의 불상은 목태니소(木苔泥塑) 또는 석태니소(石苔泥塑)가 대부분이고 용문석굴과 운강석굴은 석상 자체이다
손 부위에 나무로 만든 기본틀이 보이는 게 목태니소(木苔泥塑)의 흔적이 분명히 드러나 보인다
천불상
현재 맥적산의 잔도는 대부분 근래 새로 만들어졌지만 이것은 예전 것이 그대로 보존되어 남아있는 부분이다
불상의 반 정도는 철창 속에 갇혀 영어의 몸이 되었다 물론 보호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일 테지만.....
불상이 1,600여 년 동안에 걸쳐 만들어지며 조성 시기에 따라 그 시대적 정치, 문화, 사회, 및 생활을 반영하듯 불상의 모습도 제각각이다 당나라 번성기 때에 만들어진 불상들은 대체로 살이 통통하고 갖은 보석으로 치장한 채 반라의 형태이다 양귀비가 그러했다고 하듯이 그 시대에는 약간의 비만이 미인의 기준이었던 시절이다....
참고로 실크로드의 문화와 미술은 중국사상 흔히 황금기로 불리는 당나라 때(618~907)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당나라가 멸망하고 이슬람교가 들어오며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역시 당나라 때 만들어진 불상이다 목에 세겹의 주름이 진 살찐 형태에 반쯤 벗고 보석은 치렁치렁하다
중국의 유명산을 비롯한 관광지에 가면 잔도는 거의 빠지지 않는다 오래 전부터 중국인들은 잔도의 달인이었던가 보다
감실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고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있으며 내부가 어두워 속이 잘 들여다 보이지 않는 경우도 꽤 있다 일반 카메라로는 불상을 촬영하려고 해도 겉의 철망만 찍힐 뿐 불상은 도저히 찍을 수 없다 방법은 스마트폰을 철망에 딱 붙여 찍으면 가능할 것이다
맥적산 관람을 마치고 하서회랑을 따라 300km 떨어진 난주로 이동한다 관중평원 지대를 벗어나자 수목은 점점 사라지고 주변지형이 점점 황토고원 형태로 변해간다
저녁 무렵 도착한 감숙성의 성도 난주(蘭州, 란저우) 시내 한가운데로 황하가 흐른다 내일 병령사 석굴을 보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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