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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6년 11월 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 탐방기 4편
작성자 박*일
작성일 2017.01.24


<혜초여행사 원고>

 

2016년 11월 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 탐방기

(고쿄 – 촐라 – EBC – 칼라파타르)

 

변호사 박용일

 

 

제 4편 고락셉에서 탕보체 거쳐 남체로

 

9. 고락셉에서 페리체, 상보체까지 (11-12일째)

  고락셉에서 어제 올라온 길을 되짚어 로부체 고개를 넘고 낯익은 로부체에서 라면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오랜만에 먹어서 인지 맛있었습니다. 그곳 식당에는 히말라야 사진들도 걸려 있었고 한쪽에 트레커들이 두고 간 듯한 책들이 서가에 꽂혀 있어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하루만 여유가 더 있다면 혼자서라도 빙하 건너 콩마 라를 넘고 임자초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임자초는 임자체(6189m)부근의, 빙하가 막혀 댐이 된 큰 호수로 예전에 눈 속에 힘들여 다녀온 곳으로 그 이후 호수물이 크게 불어나 홍수를 일으킬 위험이 커져 계속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는 곳입니다.

  로부체에서 20여분 지나서 만난 삼거리에서 어제 종글라에서 올라오던 길을 벗어나 왼쪽으로 내려가니 불탑들과 타르초가 나부끼는 낯익은 투클라 고개(4830m)가 나타나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고개 곳곳에 있는, 이곳 히말라야에서 사망한 셀파 등 많은 이들의 추모비를 만나니 숙연해졌고 특히 우리나라 산악인은 물론 젊은 얼굴의 사진을 담은 추모비 앞에 서니 안 되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안나푸르나, 랑탕을 거쳐 왔다는 50대 중반의 진주출신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이번 여행 중 현지여행사를 통해 히말라야 트레킹을 나선 용감한 우리나라 트레커들을 만났는데 강화도에서 온 50대 남성은 혼자서 EBC를 다녀온 길이고, 여행사 직원인 30대 여성은 혼자서 3대 패스를 넘어왔고 남체에서 만난 60대 남성 2명은 네팔 히말라야의 3대 트레킹을 마쳤다는 데도 지친 기색이 없어 놀라웠습니다.

 


  투클라 고개를 넘고 마을을 지나자 산등선 길은 위쪽(왼쪽)으로는 딩보체로, 아래쪽은 오늘의 목적지 페리체로 나누어졌습니다. 계곡 건너 우뚝 솟은 촐라체와 타부체 두 봉의 북벽들이 촐라체빙하 및 촐라초와 함께 그림같이 펼쳐져있어 발걸음을 자주 멈추게 하였습니다. 예전에는 딩보체에서 저 윗길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이 길로 내려왔던 기억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산등선 길에서 내려 선 길은 넓은 계곡 가운데로 나있었고 촐라초 등에서 흘러내린 강물은 타부체 지맥들 아래를 흐르면서 계곡 곳곳에 펴져 멋진 초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어 매우 평화스러웠고 타부체봉 너머로 해가 지면서 드리운 그림자들은 붉게 물들어가는 산봉우리들과 함께 환상의 계곡으로 변하게 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넓은 계곡을 환상에 취한 듯 터벅터벅 걸었는데 일행들은 더 이상 보이지도 않아 외딴 곳을 거니는 단독자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페리체가 보이기 시작할 쯤은 계곡은 더욱 넓어져 물갈래길이 더욱 많아지고 페리체 저 너머 아마다블람, 캉테가 등 낯익은 설산들이 마지막 햇살을 정상에 받으며 반겨주었습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이 부근에서 보는 마을, 주위의 계곡과 건너편의 산들이 빚어낸 멋진 풍경은 과히 쿰부히말 최고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칼라파타르로의 힘든 등정으로 시작한 긴 하루의 지친 몸이 이제야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한 몫 하였을 것입니다.

 

 

  페리체는 보건진료소까지 있는 큰 마을인데 숙소를 몰라 롯지마다 기웃거리다가 마을 끝에서 마중 나온 포터들을 만나니 성경에 나오는 장남인 탕아가 집에 돌아온 듯 한편 미안하기도 하고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저녁에는 식당에서 캐나다인 가족들과 이번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대학생인 아들이 별 사진을 찍는다고 하여 롯지 방 앞에 나와 안드로메다 은하, 카시오페아 등을 가리켜주었으나 생각만치 선명하지가 않아 약간 실망스러웠습니다. 30여분 같이 있다가 젊은이는 들어가고 혼자서 슬리핑백 속에 들어가 은하수 속에 숫제 푹 빠져버렸습니다. 추위는 물론 존재자체를 잊은 무아 상태임을 느낄 수 있어 감동적인 시간이었습니다. 밤은 깊어져 말방울 소리만 들리고 주위의 신비스러운 산들과 하늘을 배경으로 별똥별이 가끔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언제 다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다음날은 남체까지 가는 일정인데 페리체 마을을 떠나 30여분 내려가니 딩보체에서 임자콜라를 따라 내려온 길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쿰부빙하로 오르내리는 큰 길로, 예전 EBC로 오를 때 이 길을 따라 오르던 기억이 생생하였습니다. 이곳에서 한 시간 이상 걸려 소마레를 거쳐 탕보체 부근에서 탱보체로 바로 가는 일행들과 헤어져 혼자서 오른쪽 산위 마을 탕보체로 향하였습니다. 그곳은 엄홍길재단이 세운 학교가 있어 오래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엄홍길은 한국외대 출신인데 제가 그 대학재단에 감사직을 하여 인연이 있었고 재단이사장 이재후 변호사와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을로 올라가는 길에 한글로 ‘엄홍길재단 학교 가는 길’이라는 표시도 있어 쉽
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학교 부근에서 뜻밖에 부가이드 람을 만났는데 제가 길을 잃을새라 걱정이 되어 왔다는데 한편 반갑기도 하고 한편은 미안하고 부담이 되었습니다. 학교는 마을 동쪽 언덕의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넓은 운동장 북쪽 너머로 사가르마타 등 쿰부히말의 거봉들이 우뚝 솟아있고 계곡 건너 아마다 블람, 탐세루크 등이 지척에 보였으며 학교 뒤로는 타부체 지맥들이 뻗어 내리고 있었습니다. 교무실에 들어갔더니 수업이 없어 학생들은 만날 수 없었고 선생님 3명만 컴퓨터를 고치다가 반갑게 맞으며 흰 카타를 목에 걸어 주었습니다. 이곳은 초등학교로 탕보체 외에도 부근 마을에서 학생들이 많이 오고 중학교 이상은 탐중으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기부금을 선생님에게 주려고 하였더니 기부함에 넣으라고 하여 이곳 네팔에서는 현금은 직접 주고받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과 우리나라의 촌지문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10. 탕보체에서 탱보체 거쳐 쿤데까지 (11-12일째 계속)

  탕보체도 전통적인 티베트 마을답게 마을 위에 절이 있고 곳곳에 불탑이 있으며 저 멀리 산위에 탱보체가 보였습니다. 혼자라면 저 위 산록 길을 따라 포르체로 가고 싶었으나 쿰부 지역에서 제일 큰 절이 있는 탱보체에 들리고도 싶어 계곡 쪽 길로 내려섰습니다. 계곡 강가의 조용한 데부체 마을을 지나 길은 탱보체까지 계속 오름길이었는데 랄리구라스 군락이 펼쳐져 있어 이곳도 탱보체 절 덕분에 보호받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힘들게 오른 탱보체는 넓은 산등선에 위치한 전망 좋은 마을로 넓은 사원과 롯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반갑게 일행들을 절 입구에서 만난 후 서둘러 절로 들어갔더니 제주 출신 현선생만 있었습니다. 한 무리의 서양인들이 절 안에서 젊은 스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부처님과 구루 림포체 앞에 이번 여행에서 더 크고 밝은 지혜를 얻었음에 감사의 절을 드렸습니다. 절 밖의 노스님의 손을 잡으며 인사로 옴마니반메훔의 진언을 드렸더니 반가워하였습니다.

  람과 같이 절 밖에서 기다리던 현선생이 제가 늦게 온 것에 핀잔을 주어 ‘왜 먼저 가지 않았느냐’는 대꾸도 못하고 불편한 마음이 내내 가시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 머물던 포르체 텡가에서 일행들을 만나 식사를 한 후 쿰중을 거쳐 남체로 가자고 하였더니 아무도 따라 나서는 사람이 없어 혼자서 사나사 삼거리에서 낯선 쿰중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길은 계속 오름 길로 30여분 가니 반가운 쿰중 마을이 쿰빌라 아래 나타났는데 며칠 전 에베레스트 뷰 호텔에서 내려오면서 보던 마을을 위로 올라가면서 보니 딴 마을 같았습니다. 계속 마을을 올라가니 지난번에 만난 마을 가운데 길과 이어서 힐러리 학교가 나타나서 반가웠습니다.

 

 

  이번에도 남체가 아닌 윗마을 쿤데로 향하였습니다. 저녁 해는 기울고 나들이 갔던 정겨운 한 가족만 뒤따라오는, 정겹고 한산한 마을길을 계속 올랐습니다. 외딴 집에서 들판을 건너 뛰어온 어린아이에게 초코렛을 주었더니 사진을 찍으라는 시늉을 내어 그냥 웃으며 돌아 서려니 “원 달라” 하는 소리가 들려와 이 외딴 곳에서 트레커들이 아이들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2003년 K2 곤도골라를 넘어 머문 외딴 후쉐 마을에서는 꼬마들과 어울려 저들의 학교에 가서 모금함에 돈도 넣고 집에 가서 공책과 볼펜을 주던 그리운 옛일이 생각났습니다.

  쿤데는, 이번 여행 중 만난 가장 티베트 마을답게 마을 곳곳에 오래된 불탑이 많이 서있고 특히나 긴 마니석 길은 탐중의 그것과 함께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힐러리가 설립한 병원도 있고 힐러리 기념공원까지 있는 것을 볼 때 힐러리가 이 마을을 특히 사랑한듯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히말라야 곳곳에 이렇게 셀파들을 위해 노력한 결실을 보면서 이들을 위해 무엇을 남겼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저물어 가는, 남체로 넘어가는 고개의 오래된 불탑 아래서 마을과 쿰빌라를 바라보면서 히말라야를 꿈꾸고 살아온 지난 삶을 생각하니 파키스탄 훈자보다 먼저 이곳에 와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습니다.

 

11. 쿤데에서 남체 거쳐 카트만두로 귀환 (12-13일째)

  고개에서 사가르마타, 아마다블람 등 북녘의 산들은 물론 건너편의 탐세르쿠, 캉테가와 콩데가 마지막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들었고 저 아래 남체 쪽 계곡은 깊은 안개가 가득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넘어 상보체 삼거리에서 발길은 남체가 아닌 타메 쪽으로 향하였습니다. 타메가 그립기도 하고 타메 쪽 비스듬한 산길이 더 편할 것 같았습니다. 어둑한 숲속으로 난 길은 끊일 줄 몰라 슬슬 걱정이 들었습니다. 30여분이나 내려 왔을까 다행히도 타메 쪽에서 올라오는 현지인들로부터 얼마안가면 남체- 타메 간의 큰 길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그 후에도 2-30분 더 내려가서야 반가운 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곳 계곡에는 안개가 가득하여 4-5미터 앞길도 보이지 않아 조심조심 걸으면서 남체로의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얼마를 더 가니 티베트 진언들이 가득한 큰 바위들이 나타나 남체마을에 왔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짙은 안개 속에 잠든 남체 절 앞을 지나 낯익은 골목길을 따라 곧장 호텔에 당도, 걱정하던 일행들을 반갑게 만나고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나니 이번 여행이 사실상 끝났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다음날은 남체에서 늦게야 하산을 시작하여 부가이드 람 집에 들렀는데 여행도중 람은 가는데 마다 친한 처자들이 있어 일행들은 람 집에 가면 처에게 알려준다고 놀려주었으나 정작 처 앞에서는 람 칭찬만 늘어놓았고 헤어질 때는 어린 딸에게 용돈도 주었습니다. 팍딩에서 점심식사를 했는데 남녀 일행 중 중앙아시아인 같은 남성이 등에 악기를 매고 있어 무슨 연주단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이 너무나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 영국에서 온 트레커들이고 악기는 남체에서 산 것이라고 하여 실망하였습니다. 중앙아시아인처럼 생긴 사람에게 선조의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들은 촐라를 넘었다는 저의 말을 듣고 놀라면서 여러 가지를 물었습니다. 메일 주소도 나누며 후일을 기약하였습니다.

  오늘은 어제까지와 달리 날씨가 잔뜩 흐렸는데 루크라에 당도하여서는 더욱 찌푸린 날씨라 내일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습니다. 이곳 날씨가 오후에는 흐리다가도 오전이면 다시 맑아지는 때가 많다고는 하나 하루종일 흐린 날씨인데다 어제까지 너무 좋은 날씨였기 때문입니다. 저녁식사는 가이드 꾸마르의 제안으로 일행들이 추렴을 하여 염소탕으로 회식을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가이드 등에게 약정된 팁을 건네주면서 그동안의 수고에 감사드리고 동고동락한 정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가이드들에게 서울서 사온 히말라야 트레킹 책을 선물하였고 포터 쿡들에게는 옷, 장갑 등을 나누어 주자니 수고에 비하여 너무 약소하다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여행 내내 열심히 합장과 미소로 ‘단네밧(고맙습니다)’를 연발하였고 가끔 제 18번인 ‘내 마음의 강물’, ‘청산에 살으리랏다’ 등도 불러서 그들을 위로하였음을 상기하며 미안함을 달랬습니다.

  이곳 히말라야에서의 마지막 밤을 찬란한 별빛과 함께 지낼 수 없음을 너무나 서운하게 생각하면서 그 대신 일행들과 가이드, 포터, 쿡들과 이별의 술을 마셨습니다. 페리체에서 과음하여 고생한 임선생과 현선생은 매우 조심하는 눈치였고 현선생은 귀국하면 금주할 것이라고 엄숙히 선서까지 하였습니다. 늦게까지 남아 외국인 트레커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메일주소를 교환하며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번 산행 중 많은 인상 깊은 외국인 트레커들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 본 캐나다 가족들과 술취한 노르웨이 노인들과 촐라에서 저의 환한 웃음으로 다가오던 미모의 이사벨라를 비롯하여 영국변호사 부부, 호주 타즈메니안 여성, 미국 오레곤주 가족들, 70이 넘은 일본인 부부, 중국인 젊은이 한 쌍 등등.

  걱정과 긴장 탓인지 새벽 일찍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여니 세찬 바람속에 비가 내리고 있어 어제의 걱정이 현실이 된 것 같았습니다. 간단한 식사를 하고 공항으로 나갈려는데 갑자기 전기불이 꺼지고 건물이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너무나 놀라 모두들 건물 밖 비속으로 뛰쳐나왔는데 다행히도 그 후에는 잠잠하였습니다. 얼마 후 뉴스에서 진원지가 남체 부근인 강도 5.4의 지진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난생 처음 겪어온 일이나 산행을 마친 후에 마주 친 일이라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최근에 잦은 네팔의 지진을 생각하니 여전히 걱정되었고 우리나라 경주 지진을 생각하니 우리나라도 이제는 지진에서 안전지대가 아님과 무엇보다 원전정책에 대한 각성이 절실하다고 느꼈습니다.

  에어 타라의 첫 비행기가 올 소식을 초초하게 한 시간여 기다리다가 공항에 나갔더니 좁은 공항 대합실은 트레커들로 초만원이었습니다. 마음 졸이며 한 시간여 기다리니 다행히도 고대하던 소형비행기들이 속속 도착하여 두 번째 에어 타라를 탈 수 있었습니다. 비탈진 루크라 공항의 활주로를 내리달려 계곡위로 솟아오르니 정든 히말라야를 떠난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였습니다. 2주전 히말라야로 들어갈 때와는 달리 짙은 구름 속을 헤쳐 카트만두로 향하였는데 생각은 자꾸 구름 너머 쿰부히말 곳곳으로 날아갔습니다.

  카트만두에서는 공항에서 곧장 바그마티 강가의 힌두사원 파슈파티나트에 가서 왕족인 듯한 사람의 화장하는 현장을 한 시간여 지켜보면서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오래전부터 80대 중반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폐기하거나 적어도 곡기를 끊고 또렷한 의식 속에서 바르도인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소위 열반하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히말라야 여행도 잘 살다가 후회없이 죽기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화스러운 야크 & 예티호텔에 짐을 풀고 오후에는 타멜 남쪽의 800년 고도인 박타푸르로 갔습니다. 저에게는 이곳이 3번째 방문이었는데 뉴스에서 보던대로 몇 년 전 일어난 큰 지진으로 오래되고 귀중한 목조건물들이 많이 부서져 있어 안타까웠습니다. 지금도 복구를 하고 있었으나 피해가 워낙 커서 시간과 돈이 많이 들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네팔은 마오이스트 등의 힘으로 왕정을 몰아내고 민주공화국을 세웠으나 연립정권이라 기존 기득권 세력들의 부패가 여전하고 부의 불평등이 더욱 심해 졌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세계적 현상으로 특히 소위 후진국들이 공통으로 겪는 괴로움이라는 생각과 함께 세계사적 시민혁명이라고 세계가 놀란다는 광화문광장의 민주화 함성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네팔도 하루빨리 보다 실질적인 민주화가 진전되어 포터 등 살아가기 매우 힘든 네팔인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 날 오전에는 타멜의 필그림 등 서점에 들러 쿠르트 딤버거의 ‘정상과 비밀’ 등 글을 모은 『옴니버스』와 산악사진의 역사에 관한 조에 벤센의 『고지의 선물』 등 귀한 책들과 칼라파타르, 고쿄리에서 찍은 히말라야 파노라마 사진들 및 2017년 달력들을 샀습니다. 책들이 너무 무거워 곧장 우체국에 가서 어렵게, 큰돈을 들여 항공편으로 우송을 하고 서둘러 호텔에 들려 곧장 공항으로 가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7년 만에 다시 찾은 꿈같은 이번 히말라야 산행은 알찬, 감동의 연속 그 자체였고 칠순을 기념한 제 일생일대의 기념비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자신과 교훈으로 다음번에는 쿰부히말의 3대 패스 코스와 다울라기리 북쪽의 돌포를 가보리라 다짐을 하였습니다. 이번 여행을 주선해 준 혜초여행사는 물론 동행한 6명의 일행들과 가이드 등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4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