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실크로드 5 <투루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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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도 |
작성일 | 2018.06.04 |
선선역, 아직 어둠이 짙은 새벽 5 : 40 선선역에 내려 역광장을 벗어나려는데 출구가 봉해져 있다 삼엄한 경찰의 검문을 받지 않고는 바리게이트를 빠져나갈 수 없도록 되어있다 신강위구루자치구의 땅에 들어섰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경찰 검문은 도로, 호텔, 식당 등 곳곳에서 정말 성가실 정도로 이어지는데 이는 위구르족의 분리독립운동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중국 당국의 강력대응이다
쿠무타크 사막(庫木搭格 沙漠 Kumutag Desert)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끝에 위치하였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시(선선,?善)와 연결된 사막이다 역사적으로 실크로드의 일부로서 동서문화 교류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곳이다 현재 사막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쌍봉낙타 보호구역이기도 하다 사막화현상이 날로 심각해지는 오늘날 신기하게도 녹불퇴 사부진(綠不退 沙不進)의 사막화 정체를 보여 인접한 선선 도시에 전혀 폐해를 끼치지 않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있었던 고대 누란(樓蘭)왕국이 사막에 휩쓸려갈 때 누란의 공주가 자신이 인어가 되어 쿠무타크 사막에 영혼을 바칠 테니 왕국을 지켜달라고 소원하여 그 뜻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전한다
어둠 속의 선선역을 빠져나와 쿠무타크 사막에 도착하니 아직 해도 뜨지 않았고 당연 개장 전이다 사전 예약한 직원을 전화로 부르니 스쿠터를 타고 달려나오는데 잠이 덜 깬 표정이다 오늘 쿠무타크 사막에서 기대하는 것은 사막짚차를 타고 얼마나 신나게 달려보느냐가 주관심사이다 사실 사막의 경관이야 나미브 사막을 보고나니 다른 사막은 좀 시큰둥하기 때문이다 과거 나미브 사막에서 짚차를 타본 적은 있지만 보다 스릴감있는 주행의 맛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쌍봉낙타 형태의 정문
사막 짚차들
누란 왕국은 서역에 존재했던 36개 소국 중에 가장 번성했던 왕국 중의 하나였다 모래 속에 매몰되어 오래 동안 흔적조차 없어 묘연했었는데 1900년 스웨덴 탐험가 스벤헤딘(Sven Anders Hedin)에 의해 최초로 발굴되었다
드라이버 옆자리에 앉아 속도를 좀더 올려달라고 부탁했지만 동승자 중에 겁이 많은 분이 계셔서 어쩔 수 없었다 사구를 올라갈 때는 뒤집힐 듯하고 내려올 때는 내리꽂히는 맛으로 타야 제맛인데........
폭풍이 몰아치지 않아도 사막에는 언제나 성난 파도의 물결이 일렁인다
일출이 시작되면 햇살을 받는 쪽과 받지 못하는 쪽의 경계는 서로 등을 맞대고 극명히 갈린다 난 금수저, 넌 흙수저
사막 바로 곁에 선선 도시가 보인다 사막의 모래가 도시로 넘어올 것처럼 보이는데도 그렇지 않다고 하니 신기한 일이다 자연현상에는 인간이 잘 이해자지 못하는 부분이 아직 너무 많다
투루판(吐魯番)
투루판은 `움푹 들어간 곳`이란 의미로 즉 투루판이 부니지형이란 말이다 15-16세기 이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던 투루판국과 그 도성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지형적 특징은 고온, 건조, 강풍의 세 가지인데 그래서 예로부터 화주(火州, 불의 땅), 사주(沙州, 모래의 땅), 풍주(風州, 바람의 땅)이라고 불렀다 여름 평균 기온이 40도 이상으로 불타는 사막의 오아시스이다 천산남로와 천산북로의 분기점으로 실크로드의 요충지이며 주민 대부분은 이슬람을 믿는다 연간 강수량이 16 mm인데 분지 지형으로 가장 낮은 곳인 아이딩(艾丁湖) 호수의 해발은 -154m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사해(-392m)에 버금가는데 아시아의 우물이라고도 불린다
쿠무타크 사막 짚차를 탄 후 호텔 부페에서 아침을 먹고 이후 약 3시간 거리의 투루판으로 이동한다 불의 도시 투루판에 들어서니 역시 아직 사월임에도 열기가 후끈하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는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투루판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조한 날씨에 지열이 높아 과일의 당도가 아주 높다 포도와 하미과의 당도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화염산(火焰山)
투르판 분지의 산으로 동서 길이 98 km, 너비 9 km, 정상의 해발고도는 831.7 m로 옆으로 비스듬히 달리는 단층의 산이다 적갈색의 화염산이 햇볕을 받아 뜨거운 기류를 위로 보내는데 그 모양이 마치 붉은 산이 활활 타오르는 듯하여 화염산이라고 한다
주변은 높은 산들로 에워싸이고 지형은 분지이니 태양열이 주위로 빠져나가지 못해 더울 수밖에 없다 한여름 낮기온은 보통 50도를 약간 밑돌며 지열까지 합쳐 최고 83.5도까지 올라간 기록이 있다 연평균 강우량 16.6 mm밖에 안 되는데 증발량은 2,800 mm나 되기에 이곳을 불의 땅, 화주(火州)라 불렀다 강우량과 증발량의 차이가 거진 -3,000이면 어떤 동물과 식물도 살지 못하고 모두 타죽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카레즈로 불리는 지하관개시설이 척박한 불모지의 땅을 생존 가능을 넘어 옥토의 땅으로 변화시겼다
서유기의 등장인물상, 화염산은 16세기 명나라 시대에 나온 소설 서유기의 삼장법사에 의해 지어진 이름이다 삼장법사는 손오공 등을 데리고 불경을 가지러 인도에 가는 도중 서역에서 거대한 화염산을 만나게 되고 손오공이 우마왕의 아내 나찰녀의 보물인 파초선(芭蕉扇)을 빌려 불을 끄고 간신히 지나가게 된다
베제크리크(柏孜克里克 Bezeklik)
베제크리크(바이쯔커리커)는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꾸민 집`이란 의미이다 일명 `천불동`으로 화염산 벼랑 아래 위치하고 있다 6세기 고창국 시대부터 7세기 당나라, 13세기 원나라를 거치며 총 83개의 불교석굴사원이 조성되었다 전성기는 10세기 전후의 서위구르왕국 시대이다 이후 이슬람이 들어오며 파괴되기 시작했다
베제크리크는 화염산 기슭 절벽 바위에 형성되었는데 아래로는 무토우(Mutou)강이 흐르고 강옆으로 실크로드가 이어진다
3층 구조로 형성되었다 1층은 스님 및 대상들의 숙소 2층은 석굴 사원 3층은 불탑 조성
돈황 막고굴도 천불동이지만 베제크리크도 천불동이다 천불동은 고유명사라기 보다 석굴이 많은 것을 가르키는 말이다
무토우강 옆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는 새롭게 단장되어 있고 1층 숙소는 파괴된 형태로 남아 있다
베제크리크는 당나라와 위구르 왕국의 양대에 걸쳐 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두 번의 수난을 겪게 되는데 첫번째는 11세기 이슬람의 서역 침범 때이고 두번째는 20세기 초 탐험가들에 의해서 이다
사진 촬영은 막고굴에서처럼 절대금지이다 물론 도촬의 사진이다
이슬람의 파괴 흔적이 너무나 역역하다 이슬람은 우상를 신봉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슬람 사원 내부에는 불교의 부처나 기독교의 예수상과 같은 형상예술의 흔적이 전혀 없다 그들은 이교도의 우상이 자기를 쳐다보면 저주를 받는다고 믿어 이곳 불상의 눈을 일일이 파내거나 진흙으로 덧칠을 해 훼손시켜 놓았다
1902년부터 1914년까지 독일은 네 차례에 걸쳐 탐험대라는 이름으로 투루판에 왔다 폰 르콕(A.von Le Coq)과 그륀베델(A. Greenwedel)은 약 300여 상자 분량의 벽화를 면도칼로 도려내듯 통째로 뜯어 가져가 베를린 박물관에 두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상당수가 사라졌다 일본의 오타니가 가져간 유물들 중 상당량은 한국의 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관에 남겨져 있고 또한 한때 중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홍위병의 난동도 문명파괴를 저질렀다 이렇듯 베제크리크 석굴은 문명을 외치는 현대인에 의해서 이중 삼중으로 인위적인 파괴를 당해 `아름답게 꾸민 집`이란 의미의 베제크리크는 현재 텅빈 헛간으로 변했다
이슬람의 훼손, 부처의 눈을 파내고 진흙으로 덧칠을 했다
<자료사진 1> 9굴의 위구르 왕자들, 베제크리크 천불동의 전성기는 서위구르왕국 시대(10-13세기)인데 현재 남아있는 벽화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자료사진 2> 20굴에서 독일의 폰 르콕이 예리하게 절단해 가져갔는데 칼자국 흔적이 뚜렸하다
위구르족, 아시아계통과는 전혀 달라 서양인처럼 보인다
아스타나 고분군(阿斯塔那古墓 Astana Acient Tombs)
고창국이 6 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는데 이곳은 당나라 시대 고창국의 한족 공동묘지였다 최고 273년부터 최근 778년까지 약 오백년 동안 만들어진 456기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당시의 정치, 경제, 사상, 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무게로 총 6톤이 넘는 2,700여건의 문서가 출토되어 문명의 집합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중 일본의 오타니가 가져간 것들중의 일부는 한국의 중앙박물관에 남아있다
복희(伏羲)와 여와(女蝸)상.
복희와 여와는 중국의 신화 전설에 나오는 인류의 시조로서 원래 오빠, 누이동생 사이였지만 이들의 혼인에 의해 인류가 탄생되었다고 한다 복희는 측량을 위한 곡척(曲尺)을 들고 여와는 가위를 든 형태로 서로 몸을 뱀처럼 꼬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천지만물이 새롭게 탄생한다는 의미이다
<자료사진> 40호 고분에서 명주천에 그려진 복희여와도는 일본의 오타니에 의해 출토되었는데 현재 한국의 중앙박물관에 있다
무덤은 평지에 만들어졌다
가파르지 않은 사면을 약 5m 정도 내려가면 묘실이 나오는 구조이다
발견된 무덤이 273-778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니 평균잡아 약 1,500년은 되었다 역시 공기가 너무 건조해 부패되지 않고 남은 것이다
나는 신기한 마음에 바라보지만 한편으로 이 미라는 죽어서도 남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니 잠자리가 시끄러워 인간으로서 최후의 휴식인 영면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팔자가 참 기구하다 만약 DNA를 추출해 현대의학의 복제기술로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 제일 먼저 할 말이 " 방문 좀 닫아라, 잠 좀 자자 " 일 것 같다
216호 분묘 유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풀이한 6첩 병풍도로 가운데 4첩은 공자묘에서 볼 수 있는 성인도로서 각각 옥인(玉人), 금인(金人). 석인(石人), 목인(木人)이라는 글자가 등과 가슴에 새겨져 있다 옥인은 청렴결백을, 입을 삼중으로 봉한 금인은 언행신중을, 석인은 돌처럼 결심이 굳어 흔들리지 않는 결심부동을, 목인은 거짓없이 바른 무위정직을 뜻한다고 한다
고창 고성(高昌故城 Gaochang Ruins)
투루판 동쪽 45km 지점에 자리한 실크로드 최대 유적지이다 성의 둘레는 5.4km, 높이 11.5 m, 면적은 220만 ㎢이고 고성은 외성, 내성, 궁성으로 나뉜다 기원전 1세기 때 세워졌으며 초기에는 `고창벽'이라 불렀으며 실크로드의 중요 경유지였다 460년 한민족 국문태(國文泰)에 의해 고창왕국이 건립되었으나 640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당나라가 멸망 후 9세기 중후반 위구르인이 위구르고창왕국을 세웠는데 13세기 중엽 몽골 유목민족의 침입으로 완전히 멸망하였다
고창고성 입구에 설치된 현장법사(602-664)의 조각상
국외여행이 금지되던 시절이었던 629년, 27세의 현장은 불경을 구하러 인도에 가기 위해 비밀여행을 떠난다 당나라 장안을 몰래 빠져나와 6개월만에 고창고성에 도달했을 때 국문태 국왕이 직접 환영을 나와 맞았다 현장은 약 1개월을 머물며 고창왕에게 불법을 강의한 후 다시 떠나려 하자 국왕은 극구만류했다 국왕과 형제의 의를 맺고 귀국 시 꼭 다시 들려 3년을 머물 것을 약속한 후 겨우 다시 길을 떠나는데 국왕의 후원에 힘입어 무사히 인도에 이른다 13년 후 귀국길에 현장이 고창국을 다시 들렀을 때는 실크로드를 지배하려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국왕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었다
성 둘레는 5.44 km인데 관람은 전동차를 타고 이동하며 둘러보게된다 당의 장안과 유사한 배치였고 성내 인구는 3만 명이었는데 이중 3천 명이 승려였다고 한다
이슬람 사원의 미나렛(minaret) 미나렛이 보인다는 것은 불교 왕국이 멸망하고 이슬람화되었다는 의미이다
실크로드가 가장 번성했던 시절은 전성기 당나라 때이다 당나라의 서역지배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 고구려 후손 고선지(高仙芝) 장군이다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당은 고구려 유민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유민들을 서역으로 이주시킨다 이렇게 하여 서역으로 오게 된 고선지는 아버지 고사계(高舍鷄) 장군의 뒤를 이어 721년 스무 살의 나이에 당나라의 서역 지배 거점이던 안서도호부의 장수가 된다
고선지는 토번국(현 티베트)을 격파하고 파미르 고원을 넘는 등 수차례의 원정을 통해 영토를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으로 확장시켰다 하지만 마지막 4차 원정이었던 탈라스 전투에서 2만 4천의 연합군을 이끌고 10만의 이슬람 대군과 싸웠지만 연합군의 배신으로 패하고 만다 이후 당나라는 서역의 지배를 서서히 잃게 되고 서역의 이슬람화는 이후 당나라의 멸망과 함께 가속화된다 장안으로 돌아온 고선지는 현종 때 일어난 안록산의 난을 평정하러 나섰지만 환관의 모함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당 현종이 환관보다 고선지를 더 믿었더라면 양귀비와의 사랑도, 당나라의 운명도 더 오래 유지되었을 텐데..... ?
이슬람, 마니교, 경교(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파) 등은 투루판을 넘어 더 동쪽으로 전해지지 못하고 또한 중국의 유교도 투루판을 넘어 서역으로 전해지지 못한다 오직 불교만이 인도에서 투루판을 넘어 중국 전체로의 동전(東傳)에 성공한다 왜 그랬을까? 예민한 문제여서 생략.................
대불사(大佛寺), 투루판의 열기에 지쳐 걷기를 포기하고 그늘만 찾았다
현장법사가 설법을 펼치던 곳, 현장이 설법을 위해 제단에 오를 때 국왕은 자신이 엎드려 자기의 등을 밟고 올라갈 수 있게 했다고 한다
고창고성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데 벽면에 쓰인 글귀가 눈에 띈다 ` People of all nationalities shall embrace tightly just like pomegranite seed ` 모든 종족이 석류 씨앗처럼 서로 단단히 껴안고 뭉쳐야 한다는 의미이다 중국은 한족과 56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인데 중국 당국이 신강위구르 지역의 분리독립운동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반증이다 중국은 절대 신강위구르의 분리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초행인 외국인의 눈에까지 곳곳에 포진한 서슬퍼런 경찰력은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석유, 석탄, 가스 및 희토류 등 엄청난 지하자원의 보고인데 포기할 리가 없는 것이다
소공탑(蘇公塔 Emin Minaret)
신강위구르 지역에서 현존하는 이슬람 최대의 고탑으로 1,777년 청나라 건륭제 때 건립되었다 투루판의 군왕 소래만(蘇來滿)이 자신의 아버지 액민화탁(額敏和卓 1694-1777)을 위하여 세운 탑이다 전통 이슬람 양식과 위구르 건축양식이 복합된 원추형의 탑으로 전체 높이는 44 m이고, 기부의 지름은 10 m이다 탑신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외벽에 꽃무늬 도안을 장식하여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준다 탑 안에는 벽돌로 쌓은 나선형 계단이 있으며 이를 통해 탑 꼭대기에 올라가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액민화탁 조각상
액민화탁(1694-1777)이 투루판 지역을 다스리고 있을 때 청나라가 침공하자 액민화탁은 승산이 없음을 알고 청나라에 항복하고 충성을 맹세한다 그는 청의 장군이 되어 옛 고국인 준가리아 제국을 점령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1,760년 청의 건륭황제는 보은으로 액민화탁에게 투루판을 대대로 다스릴 수 있는 군왕 권한을 부여한다 이에 대해 그의 아들 술레이만((蘇來滿)이 청에 감사를 표하고 아버지 액민화탁의 공을 알리기 위해 소공탑을 세운 것이다 액민화탁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정벌에 기여한 명장으로 추앙받을 일이지만 위구르족 입장에서는 민족을 배반한 매국노인 셈이다
소공탑과 모스크 투루판 소공탑은 실크로드를 지나는 대상들에게 `사막의 등대`였다
카레즈(坎?井 karez)
카레즈는 위구르어로 우물을 의미하며 지하수와 우물을 결합한 인수(引水)관개시설이다 카레즈의 기원은 기원전 700년 경 이란의 동부 사막지대로 추정되는데 조로아스터교의 전파와 더불어 신강위구르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카레즈 박물관, 카레즈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축소 모형도인데 1. 우측의 천산산맥의 눈 녹은 물이 파란색의 지하수가 되어 투루판 분지의 저지대로 흐르는데 2. 지하수로(검정 가로선)를 파서 지하수와 연결하여 물이 흐르게 한 다음 3. 마지막으로 지상에서 우물을 파서 사용하는 방식이다
카레즈는 중국 삼대 공정 중의 하나로 카레즈를 모두 연결하면 5,000 km이다 삼대공정은 1. 만리장성 2. 카레즈 3. 경항대운하 : 수 문제 때 만들어진 북경에서 항주까지 3,200 km에 이르는 운하
투루판 지역에 1,100여 갈래의 카레즈가 있다고 한다 투루판은 연강우량 16 mm 밖에 안되는데 비해 분지 지형으로 워낙 더워 증발량은 무려 3,000 mm이다 투루판은 위치적으로 메마르고 척박하기로 악명이 높은 죽음의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동쪽에 있다 만약 카레즈를 지상에 만들었다면 뜨거운 열기로 인해 물은 이내 증발해버릴 뿐더러 사막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져버릴 것이다 따라서 지하의 관개시설은 증발을 막고 누수를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카레즈가 없었다면 투루판의 명물 포도와 하미 농사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카레즈가 있었기에 투루판이 실크로드 상의 요충지 오아시스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카레즈는 불모의 사막을 옥토로 바꾼 인간의 지혜와 끈기의 산물이다
정향정(定向?) 지하의 어두운 곳에서 카레즈를 연결할 때 사용한 것으로 불빛의 직진성을 이용해 빛이 비치는 방향을 따라 정확하게 수로를 뚫는데 사용한 도구이다
카레즈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렇게 지하의 비좁은 곳에서 5,000 km를 뚫은 의지와 끈기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카레즈 박물관에서 지하로 내려가 본 실제 사용 중인 카레즈의 모습
임칙서(林則徐), 영국이 차 수입 등으로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발생하는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했다 아편이 급속도로 퍼지고 중독자가 늘어나자 청의 사회, 경제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임칙서가 아편몰수와 수입금지라는 강경책을 쓰자 양국과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1840년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청이 전쟁에 패하고 책임을 물어 임칙서는 신강으로 좌천되었다 임칙서가 신강에 부임한 후 카레즈는 더욱 확충되었다
기온이 높은 반면 습도가 낮아 한여름일망정 그늘에만 들어가면 더운 기운이 그렇게 심한 줄 못 느낀다 집의 옥상이든 길가이든 침대를 놓아두어 수면을 취하기도 하고 쉬기도 한다
위구르족은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즐기는 민족이어서 손님 접대 및 경사에는 춤과 노래가 빠지는 법이 없다
포도밭
가정마다 옥상에 건조장이 있을 만큼 건포도를 생산을 많이 한다 건포도의 종류도 다양하고 맛과 효능도 제각각이다
4월 말의 투루판의 더위는 한국의 한여름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이다 벌겋게 단 철판같은 하늘엔 죄다 타버렸는지 구름 한 점조차 없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투루판의 푹 꺼진 분지 안에 사람을 몰아넣고 열기로 태워죽일 듯한 기세이다 이날 난 여행 피로도 겹쳤지만 돌아다니느라 더위에 지쳐 반쯤 넋이 나갔다
호텔 정문의 검문검색, 사람은 물론 소지품도 검사한다 경비원 옆쪽에 몽둥이를 잔득 쌓아놓았는데 여기서 허튼짓하면 골로 가니 알아서 행동하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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