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실크로드 4 <돈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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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도 |
작성일 | 2018.06.04 |
돈황을 중국학자들은 `인후`에 비교한다 하서회랑을 거쳐 몰려드는 동방문물이 이곳을 지나면 몇갈래의 길로 갈라져 시원스레 빠져나가고 반대로 그 길들을 거쳐 들어오는 서역의 문물은 이곳을 지나서야 동방으로 전해지기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따라서 돈황은 지정학적으로나 문명교류사적으로 동서문명의 `보물고`, `미술관`, `사막의 대화랑` 등의 상징적 이름으로 불려진다
명사산(鳴沙山, Mingsha Shan)
바람이 불면 모래들이 구르며 나는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 같다고 하여 명사산(밍샤산)이다 오래 전 이곳이 비옥한 오아시스였던 시절 이곳을 서로 차지하려는 군대간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마침 일어난 모래 폭풍에 양쪽 군대의 병사와 말들이 파묻혀 그들이 싸우는 소리라고도 하고 파묻힌 병사들이 우는 소리라고도 전한다
소리의 실제 원인은 모래 입자들의 마찰, 정전기 및 울림현상 등으로 추정된다 둔황 도심에서 약 5 km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고 신기하게도 모래가 둔황시내로는 날려오지 않는다고 한다 높이 175m, 길이 40 km, 폭 20 km의 크기이다
입구에서 먼저 전동차를 타고 잠간 이동한다
낙타 타기 체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여기에 발생한다고 해도 아마 난 낙타를 타보려했을 것이다 다행히 이곳에서 그런 질병의 발생 보고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 정도도 못 탈 정도로 간이 작다면 비행기 떨어질까봐 아예 여행을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타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니 당연 타봐야 할 일이다
여기 낙타는 죄다 혹이 두 개인 쌍봉 낙타인데 두 혹 사이에 놓인 안장 위에 앉았지만 착지감이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낙타의 등뼈가 꽤 뾰족하게 튀어올라와 있어 안장이 없다면 회음부가 찔렸거나 찰과상이라도 입었을 것이다
주황색의 덧신 사용료가 20위안이다 사막에서의 덧신 착용은 필수라는 것을 이미 실감했기에 아마 곱절을 달라고 해도 사용했을 것이다 과거 아프리카 나미브 사막에서 양말을 신발 위에 덧신처럼 신었음에도 불구하고 잔모래가 신발 속으로 한웅큼 들어갔는데 아무리 털어도 제거가 되지 않았고 이후 근 1년 동안은 신발을 빨 때마다 모래가 계속 나왔었다
` 낙타는 사막의 배이다 ` 사막이 바다라면 낙타는 사막을 건너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배임에 틀림없다 낙타는 발바닥이 넓어 발이 모래에 잘 빠지지 않고 무거운 짐을 싣고도 잘 걸을 수 있다 그러기에 사막 지대를 통과해야했던 과거의 실크로드 대상들에게 있어 낙타는 필수 동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낙타에서 내려 사구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 전망을 즐기러 가는 올라가는 사람 등 제각각의 이유가 있겠지만 나의 목적은 모래 썰매를 타기 위함이다
썰매 1회 사용료가 20 위안이었는데 사구의 경사가 가파르지 않을뿐더러 길이도 짧아 괜히 입맛만 버렸다
낙타를 타고내릴 때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낙타가 앉은 상태에서 등에 올라타는 건 문제가 없지만 낙탁가 일어설 때 뒷발부터 일어나는데 낙타 다리가 워낙 길다보니 올라앉은 몸이 앞으로 확 쏠리며 꼬꾸라져 처빡힐 듯하고 앞발이 일어설 때는 몸이 다시 한번 뒷쪽으로 휘청거려 고삐를 꼭 잡고 있어야 한다 뭐 떨어져봐야 모래에 쳐박히는데 죽기야 하겠느냐만은.....
졸리운 건지 나른한 건지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데 이 녀석들 치아 관리가 될 턱이 없지만 잇똥(치석)이 잔득 끼여있다 냄새를 맡아보지 않았지만 입냄새가 고약할 것 같다
내가 탄 낙타를 끄는 젊은 여성 마부, 말이 아니고 낙타이니 타부(駝婦)라고 해야할 것 같다
월아천(月牙泉, Yueyaquan)
월아천(웨야취안)은 명사산 자락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호수로 한대부터 둔황 팔경의 하나로 불렸다 전설에 의하면 돈황이 갑자기 황량한 사막으로 변하자 선녀가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고 이 눈물이 샘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사막화의 진행으로 월아천의 크기 및 수심이 이전보다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사구들 한가운데 위치했고 이 지역의 강우량이 겨우 50 mm인데 반해 증발량은 2,400 mm임에도 불구하고 여태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다는 점은 신기한 일이다 월아천의 발원지는 돈황 남쪽에 솟아있는 곤륜산맥의 눈 녹은 물이 당하라는 이름의 강으로 흐르는데 이 물이 지하로 흘러 비교적 저지대인 이곳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둔황시 서남쪽 5 km 지점에 위치하였으며 남북 길이 100m, 동서 폭 25 m의 크기이다
육조부터 당나라, 송나라까지 수백년 동안 돈황 지역에 가장 번창했던 2개 종교는 불교와 도교였다 막고굴이 돈황의 불교성지였다면 월아천은 돈황의 도교성지였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사막 오아시스 장면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월아천의 전경을 제대로 보려면 사구의 정상에 올라 아래로 내려봐야 한다
사막 경사면을 오를 때 한 발짝 오르면 반 발짝은 뒤로 밀리고 푹푹 빠져 같은 높이의 산을 오를 때보다 곱절의 힘이 든다 이곳엔 나무를 사다리 형태로 연결해 경사면에 깔아두었기에 오르기가 훨씬 수월했다 타인의 돈을 빼먹는데는 이골이 난 왕서방이 어찌 사용료를 받지 않는지 의아했다....
모습이 초승달 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월아천이라고 하나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미사여구를 보태어 아름다운 여인의의 매혹적인 눈을 닮았다고, 뇌쇄적 관능미로 애를 태우게 하는 미인의 달콤촉촉한 입술을 닮았다고도 할 수 있을 풍경이다
산은 호수로 인하여 보다 더 아름답고 호수는 산으로 인하여 더 유명한 것이다 저녁 일몰 때의 풍경이 아주 아름답다고 들었지마 일정이 빠듯해 갈 길이 바쁘니 아쉬움이 남는다
이곳 사구의 높이는 결코 낮아지지 않는다고 한다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려가고 사람이 오르내리며 쓸려내려가니 높이가 점점 낮아질 것 같지만 밤이면 월아천의 증발로 냉각된 공기가 밤 동안에 상승하며 모래를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 생텍쥐페리가 `어린왕자`에서 한 말이다 생텍쥐페리는 그의 마지막 비행 전 과연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을까? 비록 그런적이 없다할지라도 월아천의 아름다움은 그가 소설 속에서 한 말이 진실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점심 식사로 나온 낙타발 요리 딱 한 점 먹어봤는데 약간 쫄깃한 맛이었다
돈황 막고굴(莫高窟 Mogao Grottoes)
일명 천불동(天佛洞)로 불리며 실크로드의 요충지 돈황의 도심에서 25 km 떨어진 명사산의 동쪽 기슭 절벽에 남북으로 약 1.8 km에 걸쳐 조성된 석굴군이다 1,100여 년의 기간 동안에 걸쳐 만들어진 492개의 석굴, 조각 및 벽화들이 건조한 사막에 존재했던 까닭에 잘 보존될 수 있었으며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각 석굴마다 빈틈없이 그려진 벽화들은 불교미술의 뿌리로 일컬어질 정도여서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미술관 중의 하나`, 세계 최대의 화랑`, `사막의 위대한 미술관` 등으로 일컬어 진다 장경동이라 불려지는 제17굴은 송대까지의 경전, 회화 및 문서가 보관되어 있던 곳으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바로 이곳 제17굴에서 발견되었다
막고굴은 보고싶다고 바로 볼 수는 없다 먼저 영상관에서 약 50분 동안 관련 영상을 시청해야만 한다 영상물의 내용은 막고굴이 만들어진 과정 및 막고굴 내부 모습을 담은 영상 등 2편이다
막고굴에서의 사진 촬영은 일절 금지이다 영상관에서마저도.....
영상관람이 끝나면 대기하고 있는 환보차를 타고 막고굴로 이동한다 이동 시간 약 20분 정도의 거리에 막고굴이 있다
명사산 동쪽 모래가 굳어져 만들어진 역암의 절벽면에 막고굴이 벌집모양으로 보인다
돈황 석굴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366년 락준(樂?)이란 승려가 이곳을 지나치다 밝은 빛이 비치며 그 속에 수많은 부처님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석굴을 최초로 만들기 시작했다
돈황 석굴은 왕모래가 진흙 등과 섞여 이루어진 역암이어서 불상을 조각할 수 없고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 그래서 벽면에 흙을 발라 벽화를 그렸고 강바닥에서 채취한 흙을 이겨 불상을 조성했다 흙으로 만든 소상은 나무골재에 풀새끼를 묶고 강바닥에 침전된 고운 점토를 삼베나 모래 등과 섞어 형상을 만들고 이 위를 백토로 마감한 뒤 색채나 금박을 입혀 아름다운 상을 만든 목태니소가 대부분이다
석굴은 철저한 관리하에 있다 모든 석굴의 입구는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있어 아무렇게나 들어가 볼 수 없다 열쇠를 지닌 안내인의 지도하에서만 가능한데 그것도 일부만 제한적으로 볼 수 있고 관람시간은 대략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사진 촬영은 물론 일절 금지되어 눈으로만 보고 머리 속에 담아야 한다 물론 보존을 위한 조치일 테지만 비싼 입장료 내고 들어왔는데 하도 까탈스럽게 구니 다소 짜증나는 면도 없지 않다 과거 20세기 초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시절 서양 탐험가들에게 무방비로 털린 것에 대한 때늦은 정신적 후유증이 작용하는 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외부로 노출된 벽화여서 촬영할 수 있었다
벽화 여기저기에 돈 많고 권세 있는 귀인들의 공양이나 시주로 그려졌다는 기록은 있어도 그 어디에도 어느 화공이 그렸다고 밝힌 기록은 없다 막고굴에 남은 불후의 화폭 하나하나는 모두 천대받고 멸시당하던 화공들의 손끝에서 나온 걸작들인데 정작 `사막의 대화랑`을 만든 화공들은 당시 노예 신세나 다름없었다 일시 천하를 호령하는 군주도 죽으면 한 줌 흙이 되어 쓸모없는 해골로 남지만, 이름을 남기지 않은 공장들은 이렇게 영생하는 작품을 남겼다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는 이들에게 막고굴은 필수코스일 수밖에 없다 막고굴은 인도의 불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전래되어 천년 이상의 세월을 거치며 형성된 불교미술의 성지이고 한국불교는 중국을 통해 전래된 것이기에 이곳은 불교문화의 변천사를 파악하는데 꼭 필요한 답사코스이지 않을까....
16굴과 17굴 입구 이번 여행에서 가장 보고싶었던 곳이 돈황의 막고굴이고 그중에서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17굴(藏經洞동)이 제일의 관심지었기에 17굴이란 숫자가 보이는 순간 약간의 설레임과 흥분으로 입술에 침이 약간 마르는 듯한 긴장을 느낀다 입장하기전 우선 입술에 침을 한번 바르고......
막고굴의 북쪽 끝부분에 위치한 3층 누각의 1층에 16굴이 있는데 16굴 입구의 우측 부분에 곁굴 형태로 17굴이 존재한다 1,900년 막고굴의 주지 왕원록(王圓?) 도사가 쌓인 토사를 치우다 벽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17굴이 발견되었다 17굴이 막혀 있었던 이유는 1,054년 경 서하가 돈황을 지배하던 시절 이슬람이 들어오며 그들에 의한 파괴를 우려해 모든 문서들을 17굴 속에 넣고 폐쇄해버린 것으로 추정한다
실크로드상에서 불교문명이 사라지게 된 원인은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던 당나라의 멸망과 이슬람이란 새로운 종교의 도래 때문이다 무슬림은 형상예술(특히 사람의 모습을 묘사한 불상, 예수상 등)을 금기시했기에 불교문화의 종말을 의미했다 수많은 불상조각과 벽화가 파괴되고 불탑과 사원은 무너졌다 당대에 비해 서쪽 영토를 잃은 명대(1368~1644)에는 실크로드가 거의 방치된 상태에서 서방과의 접촉은 끊어지고 자폐의 길을 택함에 따라 돈황 및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는 오랜 세월 동안 잊혀지게 되는데 20세기 초 서방 탐험가들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사막의 모래 속에 묻힌 상태로 남겨졌다
현재 17굴 입구는 유리문으로 되어있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데 크기는 사방 3m 정도로 중앙에 당나라 고승 홍변(洪?)의 소상이 있고 주변에 과거 존재했던 수많은 문서들은 말끔히 옮겨져 있다
< 16굴 내부 모습(1908년 오렐 스타인 촬영, 17굴은 우측 문서들 위로 곁굴 형태로 보인다 >
1,899년 헝가리 지질학자 로치(L. de Loczy)가 처음으로 막고굴을 탐방한 이래 서방의 이방인들이 탐험이라는 이름 아래 앞다퉈 이 비장의 보물고 앞에 모여들었다 영국의 탐험가 오렐 스타인(A. Stein)은 석굴 주지 왕원록을 꾀어 25 상자 분량을 은화 40닢과 바꾸어 런던으로 가져갔고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오(P. Pelliot) 역시 왕 도사를 매수해 29 상자를 헐값에 사들여 프랑스로 직송했다 뒤이어 약삭빠른 일본의 오타니(大谷) 탐험대가 500여 권의 문서를 챙겨갔다
이런 사실은 피터 홉커크(Peter Hopkirk)가 지은 `실크로드의 악마들(Foreign Devils on the Silk Road)`속에 잘 적혀있는데 이중 오타니 일행이 돈황 등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수집한 회화, 문서 등 상당 부분이 현재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데 조선의 광산채굴권을 얻기 위해 조선총독에게 바쳤는데 해방이 되며 그대로 남겨진 것이다 현재 우리는 남의 나라 문화재를 어부지리로 챙긴 격이 되었는데 그렇다고 오타니의 악의가 선의로 바뀔 수는 없다
값어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문화재를 도둑맞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일이건만 편취자들은 `문화유산의 보편주의적 가치` 운운하며 돌려주지 않고 있다 당시 청나라의 어지러운 정국 속에 비록 문화재를 지킬 능력이 없었고 또한 현지인에 의한 무차별적 훼손도 적지 않았다 예로 벽화의 밝은 안료 성분이 비료 효과가 있다고 믿어 파괴하였고 들보나 서까래의 재목들은 건축자재나 땔감용으로 뜯어갔다 또한 문화혁명 동안 홍위병에 의한 문화재 파괴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편취자들은 자기들이 아니었으면 파괴되었을 문화재를 미리 보호한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원래의 창조자인 주인한테 돌려주는 게 지당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순리대로만 돌아가던가, 순리대로라면 우리는 일본에서 찾아올 문화재가 얼마나 많을지........
< 17굴 내부에서 문서들을 살피는 폰 펠리오 >
장경동(藏經洞), 17굴은 `돈황문서`로 일컬어지는 송대까지의 약 3만여 점의 경전이나 문서가 보관되어 있었기에 장경동이라 부른다 한문,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호탄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씌였는데 불교 관련 내용이 대부분이다 `왕오천축국전`, 마니교와 경교의 경전도 있으며 심지어 사원의 경영 기록이나 호적, 토지문서 같은 문서도 있다 이들은 현재 `돈황학`이란 학문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되고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베트남 하노이에 와있던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펠리오는 언어의 천재로서 중국의 고사까지 줄줄이 욀 정도로 중국어에 능통했다고 하는데 그는 아마 왕오천축국전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보지 않았을까?
왕오천축국전은 신라 출신의 승려 혜초가 19살이던 723년 중국의 장안(서안)을 출발해 광주로 내려가 뱃길로 인도에 들어간 후 인도의 다섯 천축국을 여행하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4년 만인 727년 장안으로 돌아온 한국인 최초의 여행기로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풍습 등을 생생히담고 있다 7세기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4세기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와 함께 세계4대 여행기로 꼽힌다 왕오천축국전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 왕오천축국전를 미리 읽어보았는데 모든 게 그때와는 너무 변한 탓에 나라 이름부터 생소하고 낯설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혜초는 사막, 고원, 도적떼, 추위, 맹수가 함께 하는 고단한 여정 동안 총 5편의 시를 남겼는데 고국에 대한 향수가 짙게 베어나는 1,300년 전의 시 1편으로....
『 달 밝은 밤에 고향길 바라보니 뜬구름만 흩날리며 돌아가고 있네 편지라도 써서 구름편에 부치고 싶건만 바람이 급해 구름은 돌아보지도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는데 남의 나라 땅 서쪽 모퉁이에 와 그리워하네 더운 남쪽 천축은 기러기도 없으니 누가 고향의 숲을 향해 날아가려나 』
혜초는 결국 고향 계림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당나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 왕오천축국전>
< 혜초의 이동경로 >
막고굴 관람을 끝내고 한국어 통역 안내원에게 감사의 토닥거림을 하며 " 왜 막고굴(莫高窟)이라 부르지요? " " 사막의 높은 곳에 있는 굴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러요 "
돈황은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이다 실크로드에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은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의미의 사막이다 서역으로 떠나는 대상과 순례자들은 돈황을 떠나는 순간부터 낙타똥과 죽은 사람의 해골만이 이정표가 되는 무시무시한 사막의 길로 접어들기에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이곳 석굴사원을 찾아 무사안녕을 빌었고 서역으로부터 들어오는 사람은 무사히 사막을 건너게 해 준 것에 대해 이곳에 들러 감사를 드렸다 명사산의 절벽 높은 곳에 이러한 염원과 감사를 담은 석굴사원에 피었던 찬란한 불교문화의 꽃은 그 화려함이 천 년 이상 지속되었었다
돈황 관람을 마치고 저녁 식사 후 2시간 거리의 유원역으로 이동한다 22 : 29 발 야간열차를 타고 감숙성을 떠나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선선을 향하는데 다음 날 5 : 40 도착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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